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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그리고 미국 생활 이야기

불량 전자제품으로 고생한 이야기

레몬이란 말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당연히 단맛보다는 신맛이 강한 노란색의 과일 레몬을 떠오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제가 오래 전에 처음 영어공부에 도전했을 때 흥미롭게도 레몬(lemon)이란 말이 결함이 있는 물건의 뜻으로도 쓰인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 의미가 쉽게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당시에 아무래도 레몬은 쉽게 볼 수 있는 과일은 아니어서 그랬는지 그냥 맛으로 먹기에는 별로 적합하지 않았지만 뭔가 고급 과일로 생각이 되어서 제가 연상하는 고급스러움과 결함이 있는 물건이라는 단어 사이에 별로 연관성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레몬이 왜 레몬일까

미국 친구들에게 한번은 왜 레몬이 레몬이냐 하고 물어보니 대부분의 대답은 오렌지 같은 과일과 비교해서 레몬은 냄새도 좋고 보기도 좋은데 먹어보면 시고 맛이 없으니 그런 것이다라고 하더군요. 요리에는 써도 생과일로서 먹기는 부적합하기 때문에 이 말을 들으니 이해가 가기도 했습니다. 미국에서 결함 있는 물건의 의미로 이 레몬이라는 표현을 가장 많이 들어본 상황은 아무래도 자동차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였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차를 샀는데 사자마자 문제가 생겨서 정비공장에 갖다 주게 되면 사람들이 주위에서 걱정해주면서 그 차 레몬이면 어떡하냐?” 하고 말을 해줍니다. 그래서 그런지 법 중에서도 이런 불량품과 관련된 법으로 “lemon law”라는 것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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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전에 한국에서 한번은 추적 60분을 보는데 불량품 자동차를 구매한 소비자들이 자동차 회사를 대상으로 힘겨운 투쟁을 벌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시 제 차가 대우 르망이었기 때문에 제가 대우자동차를 더 편애하였기 때문이었겠지만 어쩐지 국내 시장을 주름잡고 있던 현대 자동차는 별로 좋은 인상이 아니었고 마침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가 나온 현대로부터 불량 자동차 구매자들의 억울한 이야기는 현대가 그럼 그렇지.”하는 생각을 들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방송이 진행되면서 초기에는 주로 현대 자동차 이야기가 나오다가 결국은 대우나 기아, 쌍용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자동차 회사가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복잡한 제품을 만들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결함이 많은 제품이 나올 수 있다는 점은 이해가 되는데 문제는 물건을 제조한 회사의 태도가 문제인 것 같습니다.

XX자동차 불매 운동

방송에서 제가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XX자동차의 차를 사지 맙시다라는 식의 플래카드를 차에 두르고 다니면서 자동차 회사의 거만한 태도에 분노를 표하고 있었는데 대부분의 자동차 회사가 교환이나 환불을 거절하고 계속 수리만 받으라고 하면서 다른 방법이 없노라고 하였다고 했습니다. 당시에 이렇게 잘못된 차를 구매하는 것을 언제까지 소비자 개인의 불운으로 돌려야 할지 답답한 생각도 들었고 지금은 얼마나 많이 상황이 변했나 모르겠습니다만 대부분 천만 원도 넘는 고가의 물건인 자동차를 사서 차를 제대로 타보지도 못하고 정비 공장만 들락거려야 하는 사람들의 좌절과 분노는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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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ctionary.com 사전에 나온 레몬의 정의


미국은 진작부터 자동차 문화가 발달한 나라이고 기계류로서는 고도의 복잡성을 가진데다가 값도 비싼 자동차가 이런 문제를 일으킬 확률이 높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어서인지 위에 말씀 드린 레몬 법이 진작부터 존재했고 바로 이런 문제를 해결해줍니다. 주마다 법의 내용과 이름이 다르지만 새 차가 반복적으로 말썽을 일으키면 레몬 법에 호소하여 교환이나 환불이 가능합니다.

내가 만난 최강 레몬 S전자 DVD콤보

어쨌거나 본론으로 돌아가서 저도 정말 제대로 된 레몬을 만난 적이(구매한 적이) 있습니다. 처음 미국에 왔던 1995년 여름에 저는 여러 가지 전자제품을 구매하고 있었는데 참고로 말씀 드리지만 미국은 전압이 100-110볼트이기 때문에 한국의 전자제품을 가져와서 쓰려면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간혹 프리볼트라고 해서 100볼트에서 220볼트까지 다 쓸 수 있는 제품도 있습니다만 대부분은 별도의 어댑터나 변압기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이런 사실을 미리 알았기 때문에 한국한국 올 때 이삿짐에는 전자제품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고 당연히 텔레비전, 비디오, 전자레인지 등 거의 모든 가전제품을 새로 장만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여러 가지 멋진 최신 전자제품으로 집을 채울 꿈에 부풀어 있었지만 미국도 예상외로 전자제품 값이 그렇게 싸지 않았고 조금씩 조금씩 눈을 낮추다 보니 예산상 가장 가격이 저렴한 제품밖에는 계산이 맞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비디오플레이어가 문제였습니다. 사실 비디오를 얼마나 보고 살지는 몰랐지만 아무리 그래도 집에 비디오플레이어와 DVD 플레이어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두 가지가 한꺼번에 들어있는 소위 콤보제품을 구입하기로 했습니다. 비디오나 DVD플레이어 자체로는 4-5만 원대 제품이 꽤 많아서 비싸지는 않았습니다만 콤보는 제품이 많지 않고 가격도 10만 원대 제품이 대부분이라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더군다나 애국심이 조금 발동해서 대부분의 가전제품을 국내 S사나 L사의 제품으로만 한정하고 보니 더더욱 선택권이 그리 넓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박스가 열린 제품"이 무엇?

그런데 어느 날 미국의 가전제품 양판점인 베스트바이에 갔다가 아주 좋은 가격의 제품을 발견했습니다. 벌써 몇 년 전 일이라 기억이 선명하지는 않습니다만 국내 가전 S사의 콤보가 원래는 11만원 정도하는 제품인데 8만원 정도로 대폭 할인되어 나온 것이었습니다. 한가지 찜찜한 점이 있었다면 가격표에 ‘open box item’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표현 자체를 처음 들어보아서 무슨 의미일가 생각을 해본 결과 아마도 누군가 이 물건을 샀다가 박스를 뜯어서 실물을 보고 마음에 들지 않아서 반품한 것을 싸게 파는 것이 아닐까 하고 짐작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저에게는 박스를 누군가 한번 뜯었다는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었고 값도 30% 가량 싼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당장 그 제품을 구입해서 집에 싣고 왔습니다.
사기는 샀지만 처음 몇 주간은 비디오고 DVD이고 볼 시간이 없어서 샀던 콤보를 같은 S사 텔레비전 옆에 고이 모셔두고 성능시험도 못해봤습니다. 생활이 안정되고 적응이 될 무렵 동네 비디오가게에 회원 신청을 했고 드디어 어느 일요일 오후 대여한 DVD로 영화를 한 편 보기로 했습니다.

열리지 않는 DVD 데크

그런데 DVD를 콤보에 집어넣고 영화를 잘 감상한 것은 좋았는데 DVD를 빼려고 eject 버튼을 눌렀는데 아무 반응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데크가 철컥 소리를 내면서 혓바닥처럼 쭉 밀려나와서 DVD를 뺄 수 있어야 하는데 말이죠. 수십 번을 껐다 켰다 하고 전원을 뽑았다가 꽂아보고 리모컨으로 해보고 콤보의 스위치를 직접 눌러보고 하면서 30분 정도 시간을 보내니까 운이 좋게 열리더군요. 십년감수했다고 자위하며 DVD를 반납일에 잘 갖다 주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그 다음날이라도 바로 베스트바이에 가서 수리를 맡겨야 하겠지만 제가 워낙 바쁜 병원의 인턴 신분이라 다음 휴일까지 몇 주가 또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베스트바이에 가서 점잖게 이거 산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이러이러해서 고생을 했다 고쳐주기 바란다 하고 맡기도 집에 왔습니다.

한국 같았으면 아마 당일 날 고쳐주었을지도 모르겠는데 이 느려터진 미국친구들은 2주나 지나고 나서야 찾아가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또 찾으러 갈 시간을 내기가 하늘에 별 따기였고 몇 주가 지나서야 겨우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제대로 고쳤을 것이라고 의심해마지 않으며 두 번째 DVD 감상을 하려고 했습니다. DVD를 넣고 그래도 잘 작동하는지 확인을 해야 하니까 영화는 아직 보지도 못한 상태지만 한번 시험 삼아 eject 버튼을 눌러 보았습니다. …… 이게 꿈이냐 생시냐 절망이 밀려왔습니다. 여전히 요지부동 꿈적하지 않는 DVD데크…. 이제 ‘open box item’의 저주가 시작된 것입니다.

두번째 수리를 맡기다

또 반나절은 콤보 가지고 씨름하면서 영화 볼 생각은 까맣게 잊고 어떻게 하면 들어간 DVD를 깨낼까 궁리하면서 고생을 했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드라이버로 나사를 열고 분해해서 DVD를 꺼내고 싶었는데 혹시 이 과정에서 기계가 부서지면 괜히 서비스도 못 받을까 봐 하릴없이 열림 버튼만 누르면서 좋은 휴일 오후를 다 보냈습니다. 제가 사실 약간의 강박증이 있어서 옆에서 아내가 제발 그만 좀 하고 다른 일 좀 하라고 했지만 버튼을 한번만 더 눌러보면 열릴 것 같은 느낌에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은 포기. 속으로 S사도 욕하고 양심 불량한 베스트바이도 욕하고 반품한 그 누군가도 욕하면서 말이죠. 며칠 후에 DVD가 들어있는 채로 콤보를 가지고 베스트바이 매장에 다시 방문했습니다.

제 상식으로는 소비자가 이런 어이없는 일을 당하면 굉장히 사죄를 받아도 모자랄 것 같은데 이 버르장머리 없는 미국친구들은 아무런 미안함도 없이 접수만 받더군요. 문화가 달라서 그런지 너무나 당당한 모습에 기가 질릴 지경이었습니다만 어쨌거나 얻어내야 할 것은 얻어내야 하니까 이번에는 제대로 고치라고 신신당부하며 물건을 맡기고 나왔습니다. 2주 가량 된 시점에서 찾아가라는 전화가 없어서 지레 짐작으로 고쳐졌으려니 하고 하루 쉬는 날 베스트바이에 방문했습니다. 혹시 전화를 받은 거냐고 직원이 물으면서 야속하게도 아직 고쳐지지 않았다고 다음에 전화를 하면 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한 번 또 헛걸음 질을 했습니다.

세번째 같은 고장, 도대체 뭘 수리했을까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인턴 정말 시간 없습니다. 차로도 한참 걸리는 베스트바이에 정말 몇 번을 왔다갔다했는지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었습니다. 결국 곧 연락을 받고 찾으러 다시 방문했습니다. 이 번에는 도저히 속을 수가 없었습니다. 찾기 전에 직원에게 내가 이미 같은 문제로 고생을 2번을 했으니 이번에는 집에 기계를 가져가기 전에 여기서 확인을 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전원을 넣고 DVD데크를 몇 번 열었다가 닫으니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이런 별것도 아닌 문제로 두 번이나 수리를 하게 된 억울함도 이제는 잊자고 하면서 가지고 집에 왔습니다. 처음에는 집에서도 아무 문제없이 잘 열리고 닫혔습니다.

또 몇 주 후 DVD를 보려다가 시험 삼아 열고 닫기를 시도하다가 같은 현상이 또 찾아왔습니다. 진절머리를 치면서 이제는 혹시나 열릴까 헛된 시도를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수리를 맡겼습니다. 점잖게 이거 세 번째다. 똑바로 고쳐주기 바란다 하고 신신당부하고 말이죠. 몇 주 후 다시 물건을 찾고 또 집에서는 말썽을 일으키고 다시 수리를 맡기고 똑같은 일이 계속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해서 2006년 가을까지 약 5(6번인지도 모르겠습니다)을 수리했나 봅니다. DVD는 처음 사서 딱 한번 제대로 보았던 것 같습니다. 이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이제 반품을 해야 하겠다고 결심하고 구석에 처박혀 있던 영수증을 찾아서 들고 갔습니다.
 
관대한 미국의 반품문화의 함정


여기서 잠깐 미국의 반품 문화를 살펴보겠습니다. 미국은 아시다시피 반품의 천국입니다. 옷을 사가서 아무리 때가 묻게 입어도 반품을 해달라고 하면 이유도 묻지 않고 반품해 줍니다. 지금까지 한번도 반품하면서-아내와 제 성격상 반품하기 미안해서 마음에 안 들어도 그냥 쓰는 편이었지 반품을 자주 하지는 않았지만-종업원에서 눈을 흘김을 당하거나 이유를 추궁 당한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이 점 하나는 정말 마음에 들더군요. 저와 아내가 목격한 일인데 한번은 백화점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드레스, 구두, 벨트, 핸드백까지 다 반품을 하더군요.

참 이상하지요. 어떻게 저렇게 골라서 샀을 물건을 한꺼번에 모두 반품을 할까요. 그런데 저와 아내가 추리해본 바로는 아마 이 못된 아줌마가 파티 같은 곳에 참석을 하려고 세트로 색깔을 맞춰서 다 샀다가 파티 때 한번 써먹고 이제 반품하는 것이 아니냐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여간 반품을 악용하는 사람도 많지만 미국의 반품 문화는 상당히 관대합니다.

그런 점을 믿고 반품하러 간 것이었습니다. 그럴 리가 없지만 반품하는 이유라도 묻는다면 사실 반품할 이유도 충분히 되었지요. 그런데 충격적인 대답을 들었습니다. 영수증에 보면 반품에 관한 약관이 있다고 하면서 반품은 구입 한 달 이내에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힘들게 들고 갔으니 그럼 수리라도 한번 더 하자고 했더니 1년의 품질보증기간도 지나서 이제 돈을 내고 고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정말 허탈하게 고장 난 콤보를 가지고 집에 그냥 왔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인생의 교훈을 아프게만 배울까

그 후로는 콤보를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마음만 상하지 않았겠습니까. DVD는 주로 노트북 컴퓨터의 작은 화면으로만 보았습니다. 한동안 잊고 살다가 이제 아이를 키우게 되니 텔레비전으로 교육용 DVD를 좀 보여주어야 할 필요성이 생겼고 몇 달 전에 우연히 얻는 상품권으로 8만원 가량하는 소니의 (콤보가 아닌) DVD 플레이어를 구입했습니다. 사실 이성적으로는 이런 일이 어느 회사 제품을 샀어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이제 애국심이 전자제품을 사는 기준이 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콤보와 별도의 DVD 플레이어가 있는 우리집

콤보와 별도의 DVD 플레이어가 있는 우리집


그리고 open box item이라는 것 조심해야 하는 것도 배웠습니다. 어떻게 고장 난 제품을 팔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만 베스트바이도 단순히 반품이 되었을 뿐 고장여부는 모르고 팔았을 수도 있고 하여간 미스터리입니다. 그리고 반품을 하려거든 반품기간을 넘기면 안 되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사자마자 고장을 일으킨 레몬이라면 고쳐서 쓰려고 노력하지 마세요. 레몬은 레몬입니다. ㅡ,.ㅡ;;


사진출처 :

www.hort.purdue.edu/.../images/large/lemons.jpg
www.divaris.com/rereview/bestbuy0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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