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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그리고 미국 생활 이야기

비행기내에서 진짜로 응급환자가 발생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남들이 못해보는 다양한 경험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올해 초에 애지중지하던 자동차를 도난 당했던 것도 그렇고 정말 영화처럼 2주 만에 자동차 도난범이 붙잡히면서 차를 다시 찾은 것도 그렇습니다. 게다가 지난 달에 한국을 잠시 방문했을 때는 재수없게도 노트북 컴퓨터를 도난 당하기도 했습니다. 어이없게도 도난 당한지 하루가 되어가도록 모르고 있다가 다음날에야 도난 당한 것을 알고 뒤늦게 찾았으나 이미 늦었지요.

그런데 지난 달에 한국 방문을 하면서 비행기 속에서 있었던 일들은 정말 처음 겪어 보는 일 들이었습니다. 첫 번째 사건은 한국행 비행기 속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안 그래도 전날 잠을 잘 못 자고 비행기를 탔기 때문에 비행 내내 비몽사몽 하는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기내방송이 들렸습니다.


지금 기내에 응급환자가 발생했습니다. 혹시 승객 여러분 중에 의사나 간호사가 계시면 승무원에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영화에서나 보던 일이 이렇게 생기다니 하면서 벌떡 일어나서 승무원에게 알렸습니다. 비행기 꼬리 쪽의 이코노미 석에 자리를 잡았던 터라 승무원과 함께 한참 복도의 승객들을 헤치면서 비즈니스 석으로 이동을 했습니다. 이동하는 짧은 시간 동안 오만 가지 생각이 스치고 갔는데 가장 걱정되는 것은 병원도 아닌 비행기 속에서 어떤 응급조치를 얼마나 취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생각은 공개하기 부끄럽지만 저 자신을 향한 걱정이었는데 만약 제가 응급조치를 취하다가 환자가 잘못되면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가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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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빠진 소년의 이야기

여기서 잠깐 멈추고 여담이긴 한데 제가 들었던 두 가지 실화에 대해 이야기해드리려고 합니다. 첫 번째 경우는 제가 직접 본 이야기는 아니고 얼마 전에 미국 병원 동료에게 들은 환자의 이야기입니다. 병원 방문 시에 19살이었던 이 청년은 휠체어에 거의 누은채로 보호자들에 의해 병원을 방문했는데 병원 방문사유는 그냥 정기 방문이었다고 합니다. 불행히도 환자는 소위 식물인간이라고 불리는 상태중의 하나였는데 자발적 호흡도 있고 눈도 뜨고 있었지만 자기 스스로 사고하고 반응하는 능력은 거의 없는 상태였습니다. (식물인간에 해당하는 의학적 상태가 여러 개이므로 그냥 이렇게 표현을 하겠습니다.) 환자의 상태가 잘 유지되면 의사로서는 별로 해줄 것이 없는(혹은 호전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였기 때문에 이런 환자를 보는 일은 참 절망스러운 느낌을 가져다 줍니다.

그런데 왜 이 청년이 이렇게 되었는지 동료가 말해주는 환자의 사정은 정말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청년은 약 6년 전 사고가 나기 전까지는 아무런 건강상의 문제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바닷가에 가서 놀다가 파도에 휩쓸려서 물에 빠지게 되었고 근처의 사람들이 합동해서 간신히 건져냈지만 이미 10분이 지난 후였다고 합니다. 의학적으로는 물속에서 10분이면 사람이 사망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지만 처음에 물 밖으로 끌어내졌을 때는 심박동도 호흡도 없었던 이 소년은 마침 사고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에 의한 심폐소생술을 통해 다시 숨을 쉬게 되었고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뇌에 산소공급이 끊긴 상태가 지나치게 오래 유지되었던 탓에 호흡이나 심장박동을 담당하는 뇌의 부위는 돌아왔지만 사람이 사고하고 인식하는 대뇌부위는 심하게 손상을 받아서 식물인간과 같은 상태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 어지간한 수준의 간호가 아니면 환자가 폐렴, 요로감염, 욕창 등으로 오래 살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가족들의 헌신적인 간호와 보살핌으로 환자 상태는 그런대로 유지가 되었고 그렇게 6년째를 맞고 있다고 했습니다. 목숨은 건졌지만 온전한 의식이 없는 상태로 살아가야 할 청년의 비극도 그렇고 평생을 이 청년을 보살피면서 살아야 할 부모들도 그렇고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무서운 경추손상

두 번째 경우는 지금도 제가 자주 뵙는 재미교포의 이야기입니다. 이 분은 한국에서 사고를 당한 후 더 나은 치료를 위해서 일찍이 미국에 왔고 지금도 비교적 성공적인 재활치료를 통해서 비록 전동식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기는 하지만 활발한 사회적 활동을 하고 계신 분입니다. 이 분이 30대 후반이었을 때 서울에서 운전하고 가다가 교통사고나 났다고 합니다. 정말 불운하게도 목만 빼면 전신적으로 크게 다치지는 않았는데 이 목 부위의 손상이 문제였습니다. 목을 지탱하는 척추 뼈의 하나인 네 번째 경추가 부러진 것입니다. 주위를 지나던 사람들이 차에서 부상한 이 분을 끌어내었고 다행히 이대 동대문 병원이 바로 지척이라 의협심 강한 시민이 이 분을 업고 응급실까지 뛰어 갔습니다.

응급구호에 조금이라도 상식이 있는 사람은 경추 손상이 의심되는 환자를 목을 보호대등으로 완전히 고정시키지 않고 함부로 옮기면 안 되는 것을 잘 아실 겁니다. 하지만 1980년대 한국에서 이 정도의 상식이 사회전반에 퍼져있는 시기도 아니었고 부상자가 어떤지 모르는데 가까운 병원으로 일단 옮겨야 한다는 정의롭고 자비로운 마음을 탓할 수도 없을 겁니다. 어쨌거나 들쳐 업고 뛰는 동안에 이 분의 부러진 경추의 뾰족한 끝은 척수신경에 골절 자체보다도 더 많은 손상을 주어서 결국 긴 수술과 장기간의 병원 입원에도 불구하고 사지마비라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분은 그 고통의 기간을 다 뒤로 하고 사업을 하면서도 봉사에 열심인 존경스런 삶을 살고 계십니다.



부질없는 가정을 해보자면

과거에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가정을 해보는 것이 별로 의미가 없는 줄은 알지만 만약에 위 이야기 속의 소년이 구조되지 못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나에게 이 이야기를 해준 동료는 지나치게 미국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할 사람도 있을 것 같긴 하지만 이렇게 말하더군요.



부모에게 자식의 죽음처럼 절망스러운 것은 없을 것이다. 여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 슬픔은 언젠가는 극복되고 자신들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의식도 없이 하루하루를 사는 청년도 불쌍하지만 아들을 잃은 슬픔을 평생 현재진형행으로 안고 살아가는 부모들은 더 불쌍한 것이 아니냐.’



이 이야기를 듣고 너무 직설적이라 당황스럽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생명의 존엄성 운운하며 이 친구의 말에 대응하기에는 부모의 사정이 너무 참혹했습니다. 아무리 사지가 마비되고 말을 못하는 상태가 되었을지언정 부모를 알아볼 정도의 의식만 있어도 부모님들에게 얼마나 힘이 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살았지만 산 것이 아닌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과 이를 평생 지켜봐야 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정말 너무나 큰 비극인 것 같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 교통사고 후에 만약에 경추 손상이 예측되어 지금 응급구조대가 하는 것만큼의 처치가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경추를 부상당하신 분이니까 수술과 입원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사지마비라는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두 가지 경우의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선의를 가지고 남을 돕는 일이 결론적으로 진짜 도움이 되는 일이었는지 판단을 하기 어렵게 된 경우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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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사마리안인 법의 보호밖의 의사들

미국에 착한 사마리아인 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영어로 Good Samaritan law을 번역한 것인데 성경에 보면 강도를 당해서 재물을 빼앗기고 다친 사람을 다른 사람들은 모른 체 지나치는데 사마리아 인이 다친 사람을 구해서 도움을 주었다는 이야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법적인 취지는 응급상황에 처한 사람을 돕는 사람에게서 만약 일이 잘못되었을 경우에라도 법적인 책임을 면해준다는 것인데 이로써 위기에 처한 사람을 돕는 일을 활성화시키고자 하는 법입니다. 하지만 의료인에게는 이 법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의료인은 그에 합당한 의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을 것이 예상되기 때문에 만약 제가 경추 손상이 의심되는 사람을 도와준다고 그냥 업고 뛰어서 사지마비를 초래했을 경우 만약 희생자가 소송을 걸어도 이 법의 보호를 받지는 못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 있는 저는 남을 돕는 숭고한 희생의 기회를 앞두고 혹시 내가 만의 하나 뭔가 실수를 하면 어쩌나 하는 망측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제가 겪었던 일로 돌아가서 제가 도착한 비즈니스 석에서는 어떤 중년의 한국 여자분이 좌석을 뒤로 젖히고 누워계셨고 의사로 보이는 대여섯 명이 이미 그 분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의사 분이 이미 환자의 이야기를 듣고 진찰을 하고 계셨습니다. 일단 환자가 말을 하고 의식이 있다는 것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진짜 응급상태는 아닌 셈이어서 안심이 되었습니다. 혹시나 도움이 될까 해서 의사분과 환자분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옆에 서서 잠깐 들었는데 다행히 심각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승무원으로부터 들으니 환자는 갑자기 생긴 복통으로 비행기를 회항해달라고 요청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의사의 진찰결과 최악의 경우 맹장염이 의심되는 정도였고 도착지인 서울까지 환자는 무사히 갈 수 있었습니다.



돌아오는 기내에서 응급환자 또 발생

그런데 제가 미국으로 돌아올 때도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저는 자고 있는 중이었는데 옆자리의 아내가 저를 깨우는 것이었습니다.

응급환자가 발생했대. 의사 나오라는데?”


잠에서 덜 깬 저는 처음에는 농담하는 줄로 알았습니다. 아니 갈 때도 응급환자가 있었는데 또 있다는 말인가 하면서 믿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얼마지 않아 다시 다급한 기내방송이 들렸습니다.



응급환자가 발생했습니다. 기내에 의사선생님이나 간호사가 계시면 승무원에게 알려주십시오



이때서야 문제의 심각성이 느껴졌습니다. 수 분 간격으로 방송이 나갔다는 것은 아직 현장에 가있는 의료인이 없다는 이야기로 생각이 되었습니다. 지난 번처럼 누군가 환자에게 갔다면 두 번째 방송은 필요가 없었겠지요. 갑작스러운 일에 상당히 긴장하면서 다시 앞으로 나갔습니다. 이 번에도 한국인 아주머니였는데 앞 좌석의 접이용 식탁에 엎드려 자다가 앞 좌석의 외국인이 편히 누우려고 의자를 뒤로 눕힌 순간 머리를 의자 등받이 부분으로 맞았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냥 코미디영화에서 나올법한 한 희극적인 장면처럼 생각될 수도 있는데 아주머니는 상당히 심한 두통을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간단한 이학적 검사를 했는데 특별한 신경학적인 이상소견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통증의 정도가 비정상적으로 심해서 충격자체가 초래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식으로 뇌출혈이라도 생긴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경우 기내에서 조치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진단도 물론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아주머니의 혈압도 또한 매우 높다는 것이었습니다. 평소에 고혈압으로 약을 복용한다고 했는데 수시간 동안 계속 혈압이 높아서 혈압약을 복용하게 하고 계속 가슴을 졸이며 관찰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행 중에 기장이 직접 나와서 활주로에 구급차를 대기해야 하는 상태인지 정상적으로 게이트로 들어갈 수 있는지 묻더군요. 이 비행기의 승객들의 운명(?)이 제 손에 달렸다니 정말 긴장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만약 환자의 상태가 초 응급이었다면 활주로에 대기가 아니라 어디 인근 공항에 비상착륙이라도 해달라고 요구할 수 밖에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다행히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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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비행기 뉴욕에 도착하다

아슬아슬한 순간이 지나가고 비행기는 뉴욕에 도착했습니다. 항공사의 배려로 그 환자가 가장 먼저 보딩브리지를 통해 나가고 긴장의 비행은 종료가 되게 되었습니다. 내리기 직전에 스튜어디스들이 오더니 사례하고 싶은데 마땅한 것이 없다며 비행기에서 간식으로 주는 땅콩과 간식용 초콜릿 등을 가져와서 주면서 감사를 전했습니다. 실상은 환자 옆에서 환자를 위로한 것 밖에 한 것이 없는 의사로서 오히려 미안했는데 어쨌거나 무사히 도착했다는 사실에 너무 기뻐서 무슨 말을 하면서 받았는지도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대한항공에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도움을 주어서 고맙다며 감사의 편지를 보낸다고 뉴욕의 우리 집 주소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보니 편지뿐만 아니라 대한항공의 로고가 찍힌 USB메모리 스틱까지 동봉되어 왔습니다. 환자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준 것이 없다는 사실도 그렇지만 환자가 있다고 해서 불려가면서 만약 일이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하고 제 자신의 안위를 걱정한 제 모습이 너무 부끄럽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환자 진료에 아낌없는 도움을 주신 대한항공의 기장과 승무원 여러분께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사진출처 ;
http://www.meridianmagazine.com/arts/images/060503/GoodSamaritan.jpg
http://www.asian-efl-journal.com/busanmap/korean_air.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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